최종편집일 : 2022-05-26

공검면사무소(59)

최말단 행정의 산실

기사입력 22-03-08 13:34 | 최종수정 22-03-0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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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검지(恭儉池)가 한때는 삼한시대 저수지로 국정 교과서에 실렸었다. 고려 명종 때는 사록 최정분이 제방을 수축하여 그 주위가 36방리가 되었다. 본래는 함창현의 구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공검면이 되었다. 면 이름을 ‘공검(恭儉)’이라고 한 것은 못 이름 때문이라 한다. 

 

 공검면은 조선 시대에 11개 동리였는데 1913년 11월 5일에는 동리를 폐합하면서 ‘오태리’가 새로 만들어져 12개 동리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황령리’를 제외하고, 수상면과 남면 일원을 지세에 따라 병합했다.

 

 면사무소는 처음 동막리에 있었다. 이 사진은 그때의 면사무소 전경 중의 한 장면으로 1930년 부곡리로 이전한 이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때는 면 체제 운영 초기로서 별도의 청사가 없었고, 면장의 자택이나 여유 있는 주택을 주로 이용됐다. 이 사무소도 민가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관 1동과 창고 2동으로서 주변에는 통나무를 세우고, 철조망을 설치해 담장 역할을 하도록 했다.

 

 건물 3동은 모두 낮은 흙 기단 위에 건립된 민가형이다. 이때는 기단을 봉당(封堂)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을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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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은 정면 4칸 집으로 방 2칸과 창고 1칸, 부엌 1칸으로 방 앞쪽과 옆으로는 툇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일식 기와를 얻고 봉당에는 팬 장작을 줄지어 세워 놓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이다. 마당에는 자전거 2대를 세워 놓았다. 이때의 자전거는 지금의 승용차보다 희소성이 높을 시기였다. 

 

 창고 1동은 목조 함석지붕이며, 그 앞에는 일본식의 목욕 솥을 엎어 놓았고, 통나무 게양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게양대에는 일장기가 높게 게양되어 있을 것이다. 나머지 1동 창고는 흙벽돌 조의 초가이다. 

 

 면사무소는 1930년 9월 16일에는 위치를 공검면 부곡리 208-1번지로 변경하고, 이전했다. 1937년에는 3,380원의 주민 부담으로 부곡리 207번지(못가) 736평 위에 목조 본청 45평, 부속사 숙직실 15평, 창고 20평을 건립했다.

 

 1980년에는 시장이 있어 번화한 양정리에 면사무소가 있어야 한다는 주민 지지에 따라 못 안이었던 양정리 188-1번지 532평 위에 철근콘크리트조 본청 70평과 부속사 숙직실 15평, 창고 40평을 건립하여 9월 20일 이전했다. 이때의 위치가 현재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위치이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김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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