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6-05-14

[이운경의 경북스토리텔링-4] '영천 운부암(雲浮庵)에 가시거든'

기사입력 26-05-01 15:08 | 최종수정 26-05-01 15:0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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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 맞은 느티나무의 전설

 

운부암은 아담하고 소박한 산중 암자이다. 대웅전과 동서쪽에 자리한 종무소와 요사채, 보화루가 전부이다. 옛 사찰의 전통과 기풍이 살아 있다. 불교계의 고승인 경허, 만공선사, 성철 스님 등이 수행한 선방(禪房)의 전통이 아직 건재한 절집이다. 공양간 문앞은 한겨울에도 햇볕이 든다. 추운 겨울 운부암에 가면 공양간 돌계단에 앉아 햇살에 몸을 녹이곤 했다. 자본이 산중 암자까지 점령한 시절이나, 청신한 기운이 감도는 절집을 만난 것은 인연이었다. 십여 년 가까이 나는 불자도 아니면서 운부암을 자주 찾아갔고, 그곳에서 위안을 얻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보화루에 앉아 차를 마시는 재미에 빠졌다. 지인이 빚은 다구를 갖다 놓고, 차를 가져가 대중들과 나누었다. 나와 친구들이 반은 마셨지 싶다. 산중 암자가 지닌 맑은 기운이 그저 좋았다. 활자가 밤낮으로 머리속을 헤집고 다니던 시절, 나는 늘 두통에 시달렸다. 짬만 나면 작은 배낭을 메고 운부암으로 향했다. 가고 또 가도 지겹지 않았다. 운부암은 서서히 내 마음의 위안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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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부암 요사채 뒤 언덕으로 올라가면 벼락 맞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해마다 잔가지가 줄어드는 조짐이 보이지만, 올해도 느티나무는 새순을 싹틔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느린 연두의 향연이 눈물겹다. 안간힘을 다해 저 여린 생명들을 건사했을 고목 앞에서 절로 두 손을 모았다.      

   

어림잡아 오륙백 년은 넘었을 법한 고목은 운부암과 함께 시간의 강을 건너왔으리라. 수피도 반은 불에 타고 몸체는 텅 비었다. 나이테가 없으니 고목의 나이를 짐작할 뿐이다. 오그라든 수피(樹皮)는 스스로 화상을 치유한 흔적이다. 빛이 지상으로 내려꽂힌 후 우레가 천지를 뒤흔들었으리라. 태초에 하늘이 열리듯 번개가 번쩍이며 느티나무 정수리에 꽂혔다. 언덕 위 느티나무는 자신의 몸을 뜨겁게 태우는 불기둥을 내치지도 못하고 온몸으로 껴안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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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는 제 속을 부처님께 소신공양(燒身供養)했다. 비바람과 뜨거운 땡볕, 가뭄과 추위를 견디며 안으로 새긴 나이테를 다 내려 놓고 스스로 부처가 되었다. 온몸이 불길에 타오를 때 느티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옹이나 가지가 있었던 자리는 그대로 허공이 되었다. 그 사이로 비치는 봄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속이 까맣게 탄 이 나무 앞에 서면 ‘생명’과 ‘어미’라는 두 개의 명사가 떠오른다. 해마다 새싹을 틔우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속은 시커멓게 탔지만, 해마다 새싹을 키우는 나무의 기적을 읽는다. 느티나무 앞에 설 때마다 전율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땅속 깊은 뿌리에서 수액을 길어 올리는 모성의 힘이 느껴진다. 이 기적 같은 현장을 눈으로 본 이들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운부암이라는 공간이 지닌 선방의 기운과 불탄 느티나무가 설법하는 생명의 언어를 음미해 보시라.   

        

보화루(寶華樓)가 연출하는 차경(借景)의 미학

 

봄이 무르익을 즈음이면 나는 운부암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은해사를 지나 운부암 가는 길의 조붓한 풍경 속으로 스며들고 싶어서다. 보화루 앞의 겹벚꽃이 화사하게 피면 오색 연등과 함께 선경을 연출한다. 원통전 마당에서 보화루를 바라보면 네 개의 창이 만든 차경이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겹벚꽃이, 가을에는 은행잎이 사계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차경은 자연이 연출하는 미디어아트다. 보화루 마루에 올라서면 나무의 뼈대와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무는 화석으로 변신했다.

 

운부암은 은해사가 거느린 다섯 암자 중 하나이다. 이름 그대로 구름 속의 암자로서 스님들의 선방이 있는 수행 공간이다. 그래서 항시 고요하다. 흐린 날이나 늦가을 저녁 무렵이면 운무가 암자를 감싸면 신비감마저 감돈다. 경사진 산길을 돌아서면 운부암이 나타난다. 숨을 고르며 연못 옆 널찍한 돌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신다. 봉긋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암자는 자본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정갈하고 소박한 전통 암자 그대로다.

 

석축 위에 자리한 운부암의 첫인상은 수수하고 안온하다. 양반가 고택보다 규모가 작다. 지형에 맞춰 지은 원통전도 아담하다. 원통전에 모신 금동보살좌상은(보물 제514호) 조선 초기 불상 양식인데, 미소를 짓는 부처님 앞에서 내 마음도 유순해진다. 한국 건축의 미학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배치와 구조이다. 산중 절집이 자리한 터나 구조는 말해 무엇하리. 운부암도 그 자치에 자연이고 하나의 풍경이다. 계곡 옆 햇볕 잘 드는 터에 석축을 쌓고 작은 암자를 앉힌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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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부암 가는 길의 행복   


운부암 가는 길은 내가 마음을 나누었던 벗들과 자주 걸었던 길이다. 원고 쓰기에 지친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나, 사는 일이 버거울 때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위로를 받았다. 일급수 사일지 저수지에서 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간식들을 꺼내 놓는다. 나는 커피와 삶은 계란을 가져간다. 동행한 벗들과 커피를 나눠 마시면 벅찬 행복감이 밀려왔다. 사일지 건너편 산을 바라보면 내 마음에도 초록이 스며들었다. 연두와 초록이 서서히 번지면서 저수지에도 둥그런 산이 하나 그려진다.

 

산길을 걸으면 청보랏빛 산수국도 만난다. 다람쥐와 뱀과 산새, 바람을 온몸으로 호흡하곤 했다. 물가에 앉아 세족(洗足)을 하면 세상살이의 노독이 다 씻겨나간 듯 시원하다. 운부암 가는 길을 걸으면 마음과 머리가 맑아졌다. 내 어찌 그 길과 함께한 하늘과 나무와 꽃들의 환대를 잊으랴. 오죽하면 그 길 위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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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필문단의 원로이신 구활 선생과 산행 도반들을 운부암 가는 길에서 자주 만났다. 한 가지씩 간식거리를 준비하여 내려오는 길에 자리를 펴고 산중만찬을 열었다. 나도 선생님 일행을 만나면 그 자리에 끼여 와인과 커피와 간식을 먹기도 했었다. 그분들이 나누는 선문답 같은 언어는 세월의 강을 건너온 자들의 여유와 지혜의 산물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분들을 운부암 가는 길에서 볼 수 없었다.

 

삶의 짐이 무거운 이라면 운부암 가는 길을 걸어보시라. 제주에 올레길이  경북에 운부암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노라면 스스로 자연에 동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암자 뒤 느티나무를 접견한 후 보화루 누각에 앉아 차 한 잔 마시길 권한다. 겹벚꽃잎이 난분분 흩날리는 봄날을 택일하여 가시라. 삐걱대는 누각의 문을 활짝 열고 찻물을 끓여 벗들과 차를 나누다 보면 생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 진다.      

                 

◆이운경 주요 약력


△영남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현대문학 전공) △현대수필 수필 신인상(2010) △수필미학 평론 신인상(2015) △영남대학교 경일대학교 교양학부 글쓰기 외래교수 역임 △수필미학 편집주간 역임 △수필집 <그림자 놀이>. 독서칼럼집 <책을 통해 세상 속으로>. 평론집 <수필의 감각 체계>, 스토리텔링집 <경산곡곡, 스토리텔링>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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