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4-09-12

덕통산 (72)

기사입력 23-02-28 04:49 | 최종수정 23-02-28 04:49

본문

72 덕통리.jpg

 

함창읍 덕통리 산 13번지 덕통산과 덕통 마을을 태봉리 앞에서 본 1937년 전경이다. 이 사진은 산 정상부에 조성된 안동김씨 현감 김병욱의 묘역을 그의 아들 초정거사 김성규의 문집인 초정집(草亭集)을 발간하면서 촬영한 것이다.

 

산 정상에는 묘역이 석물로 조성되었고, 그 아래에는 척점재(陟岾齋)라는 재실이 있었다. 초정거사는 전남 목포에 기반을 두고, 강원도순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곳에 선친의 묘역을 조성하고, 선산(先山)으로 관리했다. 

 

1918년 7월에는 세 아들과 함께 성묘를 다녀오면서 만산동 ‘임란북천전적지’ 안에 있는 ‘침천정(枕泉亭)’을 방문해 맏아들 수산(水山) 김우진과 함께 침천정 이건 축시를 남겼고, 대청에는 지금도 그의 시판이 걸려 있다. 

 

수산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극작가로서 활동하던 중에 ‘사(死)의 찬미(讚美)’ 배우 수선(水仙) 윤심덕과 함께 대한해협에서 투신 정사했으며, 목포의 작가로서 목포문학관에 그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 산의 봉우리 이름은 옥여봉(玉輿峰)이다. 척동에서 덕통을 넘는 고갯마루에 있는 평평한 재(峙)로서 땅재산, 땅떼산으로도 불렸다. 산의 동쪽에는 영강, 남쪽에는 대평들, 북쪽에는 낮은 구릉으로 해발 139.5m의 낮은 산이지만 해발 105.5m의 태봉산과 함께 영남대로의 주요한 지형지물로 고지도에는 빠짐없이 표기되던 산이다.

 

7부 능선에는 작은 둔덕이 이어지는데 이 흔적이 ‘함창현읍지’에서는 고려 공민왕이 머물 때 축성한 ‘덕봉성’이라고 전한다. 향토사에서는 1361년 10월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했다가 고려정당 문학 문충공 난계 김득배 등의 활약으로 난이 평정되자 그 이듬해 2월 상주로 향하여 덕통에 머물면서 축성된 토성으로 보고 있다.

 

산 아래에는 조선시대 유곡도의 덕통역이 있었고,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영남대로가 문경에서 윤직-구역터-덕통-척동-태봉산-신덕-송현-사벌로 이어지는데 덕통은 역마을로서 중요한 경유지였다.

 

덕통산에서 바라보이는 태봉산은 고지도에는 고산(孤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정상부에 선조의 12남 인흥군 태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아래 형성된 마을이 태봉 마을로 구향리에 버금가는 큰 촌락이 형성되어 일본 병참부대가 주둔하였고, 1934년 갑술 대홍수로 인해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현재의 마을로 집단 이주했다. <사진 / 초정집>

김상호 기자
<저작권자 © 뉴스상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동영상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