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4-09-12

성황당(73)

기사입력 23-03-18 02:48 | 최종수정 23-03-18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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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城隍堂)은 수낭당(守郞堂)의 원말, 서낭당을 한자어로 성황당, 또는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 산허리 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를 서낭당이라 사전에서 풀이한다. 서낭은 민간 신앙으로 천신제, 산신제, 국사제, 부락제, 성황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으며, 당산(堂山)이라는 누석단(累石壇)과 신수(神樹), 신당(神堂)도 있다. 

 

당집은 초기에는 초가이던 것이 기와를 올린 전각이 되었고, 신상도 화상이나 목각 신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명칭들은 사전에도 명확하게 구분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통용되고 있는 정의는 제를 지내는 주체가 중앙과 지방의 주군현 등 관(官)은 ‘성황’, 마을 단위는 ‘서낭’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민속학자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가 수집한 것이다. 원래는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가 촬영한 것으로 뒷면에 '상주(尙州) 영빈정(迎賓亭) 성황당(城隍堂), 좌(左) 천지단, 우(右) 하인서낭'이라고 연필 글씨로 적어 놓았다.

 

촬영 시기는 석남의 생전인 1948년 이전으로 추측되며, 위치는 시내에서 함창 방향 영빈정의 동쪽 우측 노변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위치는 상산전자고등학교 서쪽 산 아래인 계산동 516번지 주변으로서 이 터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옛 국도 3호선에 편입되어 당집은 철거되고 없다. 

 

당집은 노인봉의 서쪽 경사지에 자리 잡아 앞쪽에 낮은 기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목조 단칸으로 세우고, 여닫이문을 앞뒤로 달았다. 정면에 환기구 2개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내부는 마루방이며, 하방이 높아 디딤돌을 놓았고, 쌍여닫이 판장문을 통해 출입한다. 문 위에는 살창을 설치하였으며, 벽체 양측에는 화방벽을 처마 밑까지 쌓고, 그 벽 위에는 담장을 덮듯이 암키와 잇기를 한 것이 특이하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화재 예방을 위한 화방벽과 담장이 혼합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지붕은 서까래가 왜소한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초가였다가 후에 기와를 얻은 것 같이 보인다. 기와 위에는 와송이 자랄 정도로 노후화되었고, 왼쪽 뒤편에는 누석단도 눈에 띈다.

 

이 사진 외에 성황당 사진은 196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상주지구 고적 조사 때 촬영된 것이 확인되는데 이때는 당집 앞에 남산공원에 세워져 있는 ‘서애 류성룡 선생 유애비’ 등 4기의 비가 세워져 있던 비석거리였다. <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김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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