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경찰 통치 시대의 공포장소, 상주경찰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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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제도는 1896년에 일본식으로 개혁하고, 일본인 경무고문(警務顧問)을 초빙해 시작했으나 곧 폐지됐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에 의해 각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었고, 도(道)에는 경무서(警務署)를 두어 관찰사 지도 감독하에 수 개소의 분서를 관장했다.
경무서에는 한국인 경무관, 분서에는 총순(總巡), 그 밑에 권임(權任)과 순사(巡査)를 배치하고, 도(道)에는 경무 고문 보조관인 경시(警視)를 두었다. 분견소에는 보조관인 경부(警部), 그 밑에 보조원인 순사를 배치해 경무서급 분서 사무를 감독했다. 상주에는 1906년 12월 경무분서급의 헌병분견소를 두고, 일본인 이노우에(井上) 고문 보좌관과 보조원 25명을 배치했다.
1907년 10월에는 경찰 사무가 통감부로 위임되고, 고문 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경무청을 경시청, 경무분서를 경찰서로 고쳤다. 계급도 종래의 경무사, 경무관, 총순, 권임, 순사 등의 명칭을 경시총감, 경시경부, 감독순사, 순사 등으로 고친다.
1908년 8월에는 지방 관제를 개정해 관찰사 밑에 경찰부를 두고, 일본인 경시를 부장에 임명했으나 치안 업무는 헌병과 같이 맡았다. 상주에도 헌병분견소가 설치되어 화서, 화북을 제외한 낙동, 공성, 함창 등 각 면에 헌병분견소 출장소를 설치했으며, 제외된 2개면은 1911년 9월 20일 관할에 편입했다.
1919년 8월 헌병제도가 폐지한 후에는 계급을 순사, 순사부장, 경부, 경부보, 경시 등으로 호칭했다. 이때 상주경찰서가 설치되어 헌병 사무를 인수하였고, 출장소는 경찰관주재소(支署)라 개칭했다. 각 면(面)에는 주재소 설치가 원칙으로서 사벌, 중동, 공검, 외남, 은척면에 신설했으나 외남은 1925년 1월 17일에 폐지했다.
1920년 12월 31일에는 왕산 남쪽에 사업비 1만 6천 9백 원으로 74.5평의 청사와 창고 8평, 기타의 부속건물 신축에 착수해 이듬해 6월 12일 준공했다. 이 사진은 문화당에서 발행한 이 시기의 사진엽서로 한국전쟁 당시에는 소실된 소방대 청사로도 이용됐다.
정원은 1925년 78명, 1937년 83명으로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많았으며, 1944년 6월에는 성하동 현재 경찰서 위치에 석회제 양옥 2층 건물의 본관과 부속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이때 세운 ‘청사 장원 공로비’가 경찰서 정문 좌측에 지금도 남아있다. <사진 : 상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