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5-03-15

본정통(本町通)의 진풍경, 누에고치 운송 (80)

기사입력 23-10-13 21:37 | 최종수정 23-10-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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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업에 관한 설화는 중국에서 전한다. 어느 집에 아버지와 딸, 말(馬)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전쟁하러 나가고, 딸과 말이 살고 있었는데 딸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 농으로 말에게 아버지를 데려오면 말한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고삐를 끊고 달려가 전쟁에 나간 아버지를 데리고 왔다. 말은 부르르 떨면서 딸을 보며 분격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딸에게 물어본 결과 말에게 시집가겠다는 농을 했는데 말이 사실대로 믿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말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뜰에 말렸다. 딸은 가죽을 발로 차면서 ‘네가 말인데 사람을 아내로 삼으려다 죽고 가죽까지 벗기게 되었는데 별수 있나!’ 했더니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죽이 벌떡 일어나 딸을 둘둘 말아 사라졌다.

 

그 후 큰 나무 사이에 딸과 가죽이 화해서 누에가 실을 쳐 놓은 것이 발견되었는데 세상에서는 누에를 여성이라 칭하고, 그 나무 이름을 뽕(桑)이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누에의 머리 모양이 말머리를 닮았고, 고치가 무엇을 둘둘 말은 형상이라 이러한 설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양잠은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선잠제(先蠶祭)를 국가 제례로 지내고, 조선 시대에는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親蠶禮) 등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세조 때는 농가마다 100그루 이상 뽕나무를 심도록 양잠을 의무화했다.

 

이 사진은 1915년 조선농회보에 ‘산견구입자 산견하조 판출(産繭購入者 産繭荷造 販出)의 상황’으로 소개된 것인데 공동판매장에서 매매된 누에고치를 본정통(本町通) 거리에서 상인이 운송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때 상인은 편창조(片倉組), 삼룡사(三龍社), 산십조(山十組) 등 8명이 있었는데 승용차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로 보인다.

 

이 장소는 남성동 황제맨션에서 서성동 왕산 방향으로 촬영된 것인데 공동판매장 앞 거리의 본정통 끝부분에 옛 상주 읍성의 남문인 ‘홍치구루’가 멀리 보인다.

 

한편 1956년 양잠 통계를 보면 호수가 23,986호, 생산량은 63,653관, 공동 판매가 봄에는 20,411관, 판매액이 3,655만 4,513원 40환, 가을에 11,229관, 판매액은 1,878만 643원 10환이었다. 생사는 3,533호에서 3,538관이 생산됐고, 명주는 연간 13,500필을 생산해 판매금액은 6,250만 환에 달했다. 

<사진 : 조선농회보 제9호> 

김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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