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기록물의 산실, 은척 우기리 동학교당(85)
본문
1976년경 은척면 우리기에 있는 동학교당의 전경이다. 지붕이 지금은 초가이지만 이때에는 천연슬레이트 잇기를 하였다. 천연슬레이트는 점토질의 퇴적암이나 세립의 응회암이 압력을 받아 응결하여 짙은 회색이나 검푸른색으로 결을 따라 일정한 두께로 얇게 쪼개지는 석판을 말한다.
이 천연슬레이트는 인근에서 생산되지 않아 충청도에서 달구지로 싣고 와서 지붕을 이었다고 전한다. 이 지붕은 1987년 전통 건조물로 지정되면서 무거워 붕괴 우려가 크고, 원형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초가지붕으로 복원한 것이다.
동학은 교조 최제우와 2대 최시형, 3대 손병희 대에 이르러 남접과 북접 간 도통 전수의 정통성 문제 등으로 대립하면서 30여 개의 교파가 만들어진다. 이때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주희 선생이 동학 정신을 계승하여 보은, 화북 일대에서 경천교로 활동하였는데 1915년부터 ‘동학교’라 칭하고, 이곳을 안동촌(安東村)이라 하여 김낙세 등과 들어와 1918년까지 교당을 세웠다.
동학교는 1922년 문화정책에 따라 보수종교로서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득하고, 1933년까지 대대적으로 동학 경전 등 간행사업을 벌여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을 꾀하였다. 이때 ‘동학교 총본부’라고 하였으며, 교세는 상주, 문경, 예천, 영주, 안동 등 경북 북부를 중심으로 충청북도와 강원도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교세가 점차 확장되자 1936년 6월 27일에는 상주경찰서 고등계에서는 김주희와 부교주 김낙세를 교내 사정과 교리 등을 불구속 신문을 하다가 7월 24일 석방하는 등 탄압을 하다가 8월 6일에는 포교, 집회, 헌미 등을 금지했다. 그해 동학교 공인은 취소되었고, 1944년 교주의 사망으로 교세가 더욱 위축되었다.
교당은 원채, 동재, 서재, 남재, 곳간채 등으로 구성된 태극체 또는 음양체라고 한다. 원채는 성채실, 동재는 접주실, 서재는 남녀 교우가 반반씩, 남재에는 남교우가 거처했다.
1987년에 전통 건조물로 지정되고, 1995년에는 유물이 1999년에는 교당이 지방 민속문화재로 각각 지정되었다. 교당에는 그 당시 간행사업에 사용된 인쇄 도구와 제례 복식, 발간 책자 등 373종 3,836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177종 1,084점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와 중복하여 289종, 1,425점의 유물은 국가 지정기록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 상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