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금산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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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조선총독부 광무과 상주출장소의 제1갱 입구에서 관리자와 광부가 함께 찍은 사진으로 1924년 7월 3일 출장소 폐지 이전 상황이다.
상주에 금 매장지는 병풍산과 그 자락에 이어지는 병성동, 헌신동, 외답동, 서곡동과 낙동면 성동리, 운평리 일대에 광맥이 있어 이 지역을 ‘상주금산(尙州金山)’이라 했으며, 사금(砂金)도 일부 산출되었다.
1914년 6월 3일 조선총독부에서는 식산국 광무과 상주출장소를 낙동면 성동리 일대에 설치했다. 이때 상주출장소 보유구역은 38,880정보이며, 조선인 개인 경영은 사금광 3광구 22만 9,782평, 일본인의 개인 경영은 금광 3광구 131만 3,477평이었다. 그러나 사업 부진으로 1924년 7월 3일 상주출장소가 폐지되었고, 보유구역은 상주광업사(松方乙彦)에 매각했다. 그 후 1925년에는 광석 14만관(貫), 가격은 8만 원 상당 산출되었다. 1929년에는 사가(佐賀)탄광 주식회사에 매도되었다.
이 시기에 금 채굴에 종사한 사람이 많았다. 금광 종사 인부의 노임이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들어 오기도 했다. 1929년 12월에는 금을 제련하기 위하여 제련소를 설치하고, 수원은 낙동강의 물을 취수하여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제련시설은 낙동면 성동리와 운평리에 근래까지도 볼 수 있었다. 1932년에는 도쿄에 본사를 둔 주가이(中外)광업 주식회사에 매도되었다.
주가이광업은 상주금산 외에도 타 광업권을 30광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주금산의 광업 구역에서는 1938년까지 외답, 병풍, 낙동, 운평, 우암(2), 서곡, 동해, 인통의 9개소에서 채광했다. 이 광도 중에서 우암 1개만 수갱(竪坑)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평갱(水平坑)이다. 굴진 한도는 수직굴은 40m, 수평굴은 100m였다. 이때 확장을 시도했는데 두산, 낙동 2개가 늘어 11개소가 되었으며, 굴진 한도가 우암의 수직굴과 낙동 1개는 변동이 없고, 나머지는 150m~250m로 늘어났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식민지 수탈의 대표적 광물이 금이다. 이 광산은 신평금광제련소, 상주금광, 삼호금광, 고봉금광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가 1960년대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폐광된 후 제련시설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었는데 성동은 매몰되었고, 운평은 가장 아래쪽 시설이 철거되었다. <사진 :수원광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