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정(二香亭)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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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남쪽 밑 상주목 관아 남쪽에 있었던 연당(蓮堂)으로서 1578년경에 정곤수 상주 목사가 창건하였는데 병란에 타 버렸다. 그 후에 1614년경에 한술 목사가 중건하고, 정자 좌우에 못을 파고 연과 화초를 심었다. 1616년 강복성 목사가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천향(天香)이라 이름을 고쳤다.
1697년에는 이항 목사가 다시 손질하고, 이향(二香)으로 다시 고쳤다. 그 이후에도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여러 번의 개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개보수를 한 후에 정자 이름을 목사의 취향에 따라 바꾸면서 수백 년간 이어진 것은 관리와 선비에게 유학 정체성을 가진 특별히 애용되었던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정자가 처음 있던 곳은 ‘상산지도’에는 주창의 동쪽, 관아의 서남쪽에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구개정(市區改正)’에 따라 시가지에 신작로를 만들 때 정자가 헐리게 될 상황이 되자 군내의 유지들이 자금을 갹출하여 상주군으로부터 사들인 후 자양산(紫陽山) 아래 약천(藥泉) 위로 옮겨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도로가 중앙시장에서 왕산 서쪽으로 이어지는 ‘남성로’로서 이 도로가 개설되면서 상주 선비 정체성의 장소였던 이향정은 철거되었다. 위치가 1917년 지형도에는 성안 남쪽 암문 옆에 석축이 쌓여 있고, 그 중간으로 도로가 개설된 형태의 논(沓)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곳은 지금의 남성동 3번지 일대로서 지표면 아래에는 잘 다듬어진 석축의 석재가 묻혀있다고 전한다. 지적공부에 의해 규모를 추측해보면 면적이 1,450㎡, 길이 동서 55m, 남북 40m, 둘레 160m 정도이다.
옮긴 곳은 만산동 ‘임란북천전적지’ 경내이다. 이때 군수는 심환진이었는데 정자 이름을 다시 침천정(枕泉亭)으로 바꾸었다. ‘침천(枕泉)’은 송나라 주희의 백장산육영(百丈山六詠)의 서각(西閣)이란 시(詩)에서 ‘어찌하면 베개 아래 샘물을 얻을까(安得枕下泉)’란 시구에서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진은 시장 전경과 이향정이 함께 촬영되었으며, 동향으로 앉은 정자로서 시장 쪽에 일각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쪽 옆에서 출입했다. 사진 촬영 시기는 ‘시구개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본정통’과 ‘태평정통’의 ‘십자 도로’가 1914년 12월 12일 개통되었는데 그 시기 주변으로 지금의 ‘남성로’가 개설되기 이전의 광경이다. (사진 ⓒ상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