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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첫 신작로 (49)

기사입력 21-05-24 17:43 | 최종수정 21-05-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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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경 시내 지명은 읍성 성벽을 중심의 지명이었으나 서성내리, 북문외리는 서정동(西町洞)로, 남성내리, 남문외리, 상남문리, 상서문리, 하서문리, 창내리는 남정리(南町里) 등 일본식으로 사용되었다.


  1915년에는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十‘자 신작로가 만들어졌는데 신작로 이름도 읍성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도로인 왕산로는 본정통(本町通), 동서로 횡단하는 중앙로는 태평정통(太平町通)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다.

 

이외에 조금 더 작은 도로 이름은 상주 읍성의 성도(城道)가 남아 있었던 곳이 도로가 되었는데 남문이 있던 남성4길과 성하1길은 ‘성남정도’, 동문1길은 ‘성동정도’, 상산로는 ‘성서정도’, 서성3길은 ‘성북정도’ 등 읍성과 관련된 도로명이 되었다. 성안에 서성로는 ‘신정’, 서성2길과 금도랑길은 ‘중심정도’라 했다. 이러한 도로 이름 체계는 아이러니하게 해방 이후 없어졌다가 지금은 ‘도로명주소’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사진은 1935년경의 사진으로서 읍성 남문이 있던 쪽에서 왕산 방향으로 보면서 본정통(本町通)을 촬영한 것이다. 우측에 돔(dome)형 건물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 상주지점(조선식산은행 상주지점) 건물이다. 도로 양쪽에는 목재 전신주가 높이 서 있고, 전기가 들어온 후 10여 년이 지난 후로서 전선이 복잡하게 엉켜있다. 이러한 목재 전신주는 지금 모두 사라지고, 계산동 빙고 마을에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좌측 왕산 밑에 상주목 관아가 있던 곳에는 상업용 건물이 자리를 잡았고, 그 뒤쪽으로는 왕산 자락에 높이 자란 수목이 보인다. 우측 은행 옆 건물 앞에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설치한 차일(遮日)이라고 하는 장막을 설치하고, 그 밑에 여자 몇 명이 모여 있다. 그 맞은편에는 일광당 시계점이 있고, 시계점을 알리기 위해 둥근 벽시계를 간판 밑에 달았다. 그 앞에 자전거가 여러 대 세워져 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자전거가 중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도로 내에는 멀리 여러 사람이 통행하고, 도로 면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포장도로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 번화가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앞쪽의 여아(女兒)가 짧은 치마를 입고, 우측 참죽나무의 잎이 무성한 것으로 보아 사진 촬영 시기는 여름이다.(사진 : 상주박물관)

김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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