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계산동 장례 행렬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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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큰일을 치른다고 말한다. 여기의 큰일이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말하는데 그중에서 상례를 가장 ‘큰일’이라 했다. 조선 이전의 시대에도 상례는 있었지만,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는 성리학 이념에 맞는 예제를 갖추고 주자의 가례를 따라 3년 상을 장려했다.
사대부의 집에서는 사당을 건립하고, 유교식의 복식도 의무화되었고, 묘소 근처에서는 움집을 지어 산소를 돌보며, 공양을 드리는 시묘살이도 했다. 이러한 장례 풍속은 일반화되었고, 예제에 어긋나면 지역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기에 가난하더라도 빚을 내서 치러야만 했던 큰일이었다.
이 사진은 아리랑 고개 1길에 이어지는 상산교가 놓이지 않았던 시절, 계산동 252번지 일대를 지나는 장례 행렬이다. 1968년의 전경으로서 소장자가 결혼 후 3일째 들어서면서 조부상을 당했는데 그때 경북선 철교 위에서 촬영한 것이라 한다. 이 사진과 함께 장례가 진행되는 장면 25매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행렬은 제방 안쪽 북천 바닥을 통해 이동하는데 상여가 마을 앞을 지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마을 앞 제방 위보다는 북천 바닥을 통해 이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맨 앞에는 만장, 그다음은 요여(腰輿), 요령잡이, 상여와 12명의 상여꾼, 상주와 조문객의 행렬이 이어지고, 제방 위에도 조문객이 나와 있다. 장례의 엄숙한 모습과는 달리 상여 주변과 만장 앞에는 꼬마 몇몇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북천 바닥에는 아리랑 고개 1길로 이어지는 흙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길 주변에는 ‘새아리랑마트’가 있는 곳에 기와집이 한 채, 나머지 4채는 모두 초가집이다. 그 사이로 미루나무 4그루가 높게 서 있고, 나무 밑에는 짚가리도 여러 동이 있다. 좌측으로는 ‘현대드림파크’ 앞 북천로 옆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버드나무의 군락도 크게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강변회송어장’과 ‘사랑 정원 빌라’가 있는 곳 일부가 보이는데,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소장자는 이곳에 못(池)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때 이 계산 마을은 아리랑 고개를 통해 사벌로 이어지는 길목으로서 주막이 길을 따라 들어섰고, 마을 텃세도 심해 사벌 방면 사람들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고초를 겪은 시절이 있기도 했다.
이 사진 일괄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하는 ‘제4회 근현대 민간기록물전’에 우수상으로 입상되었다. (사진 / 냉림동 최충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