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골드러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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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경 사진으로서 중앙에는 간선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산자락 양쪽으로 여러 동의 건물이 건립되어 있다. 도로를 중심으로 앞쪽의 건물은 금의 제련시설, 도로 뒤쪽은 상주출장소 사무시설로 생각된다. 현재의 위치는 성동보육원이 있는 낙동면 성동리 35번지 일대로 추측된다. 이 광무소에는 조선총독이 참관하였는데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보인다. 1933년 3월 14일에는 제6대 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도 상주금광을 방문하였다.
금광은 조선 말기부터 메이지 말기까지 골드러시(gold rush)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상주에서는 사금과 광석을 분쇄해서 생산된 금이 상주 밖으로 다량 반출되었다. 한일병합 전에 광산은 금광 6개, 사금 2개, 흑연광 4개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1914년 6월 3일 조선총독부는 식산국 광무과 상주출장소를 낙동면에 설치(조선총독부령 제89호)하고 금광 경영비 30만원을 상주, 의주, 신흥출장소에 2개 연도 계속사업비로 책정한 것을 보면 국가 주력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상주출장소 보유구역은 38,880정보이며, 조선인 개인 경영은 사금광 3광구 22만 9,782평, 일본인의 개인 경영은 금광 3광구 131만 3,477평이었다.
그러나 사업부진으로 폐광이 속출되어 출장소 운영 10년째인 1924년 7월 3일 상주와 신흥출장소가 폐지되고, 보유구역을 상주광업사(松方乙彦)에게 불하하였다. 그 후 1925년에는 광석 14만관, 가격은 8만원 상당 산출되었다. 1929년에는 사가(佐賀)탄광주식회사에 1932년에는 도쿄에 본사를 둔 주가이(中外)광업주식회사에 매각되었다. 이외에 흑연광은 고미야(小宮)흑연광업회사(모서면), 야마시타(山下)흑연광업회사(이안면), 미야타에이지로(宮田榮二郞)흑연광산(공검면) 등이 있었다.
1913년에는 중동 회상리 사광(砂鑛)과 모서면 유방리(득수)에는 각 200여명의 노동자가 종사하였고, 1924년에는 상주 광물자원을 반출한다는 목적으로 경북선 개통 신청을 할 만큼 광산은 상주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산업이었다.<사진 : 경북사진편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