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 2025-03-15

상주역사의 중심, 왕산(王山) (14)

기사입력 18-10-15 17:44 | 최종수정 18-10-1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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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는 ‘상주읍내의 고분’으로 1914년 3월 22일 촬영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왕산과 그 앞에 상주목의 동헌이 있었던 광장을 촬영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곳에는 ‘상주수비대’가 있었는데 광장은 수비대 연병장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광장 우측에는 큰 고목이 서 있으며, 왕산 위에는 드문드문 높은 교목과 키가 낮은 침엽수도 보인다.

광장에는 도마(vaulting horse)와 씨름장 등 운동시설이 있고, 제복을 입은 사람도 6명이 있다. 좌측에는 기와집 2채가 보이는데 큰 기와집은 상주목에서 관아로 사용했던 ‘제금당(製錦堂)’ 건물로 생각된다.

  왕산은 시내의 상주읍성 중앙에 위치한 고도 70m의 낮은 산으로서 서성동 163번지 일대이다. 시내의 평균 고도가 56m 정도인 것을 보면 실제 높이는 14m정도의 낮은 산이다. 시내는 왕산 이외에 중앙공원, 두상공원, 신봉동에 낮은 바위산이 4개가 솟아 있는 형상이다.

  상산지에 왕산이 소개된 내용을 보면 상주의 가장 으뜸 산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장원봉(壯元峰)’이라고 하며, ‘장원봉’은 상주에서 장원 급제자가 많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은 높이가 수십 길이 되고 교목이 울창하여 새와 짐승이 많이 모여들며, 임진왜란 때에는 일병(日兵)이 산 정상에 누각을 지은 후 40여 년간 동안 장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지령이 놀라 그런 것으로 지기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산 밑에는 연못이 있고, 이 못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정오에 조수가 밀려오고 조수가 이정을 지나면 장원이 난다하였는데 1534년 이후에는 조수가 이정(夷亭)을 지난일이 없고 때로는 10여일이 지나도 조수마저 일지 않으니 무슨 연유인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왕산 밑 옛 상주목 관아 터는 조선시대까지 상주의 정치, 행정, 경제의 중심이었던 치소로 이용되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산 정상에는 신사(神社)가 있었고, 그 밑에는 수탈 행정기구인 재판소, 경찰서, 군청이 있었다.

산 이름도 시내 중앙에 있다 하여 ‘앙산(央山)’으로 고쳤다. 그 후에는 옛 진영 터에 상주군청을 신축한다는 명목으로 토지를 매각하여 사유화되었고, 소방조(消防組)터만 남았었다.

100여 년이 지난 최근에 와서 산 이름을 앙산(央山)에서 왕산(王山)으로 되돌리고, 개인 소유가 된 옛 관아터를 상주시에서 사들여 ‘왕산역사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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