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유교의 상징(15)
본문
상주 향교는 남산 향로봉 아래 신봉동 203-1번지에 위치한다. 가장자리에는 ‘大正元年○’이 기록되어 있어 1912년에 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 위 우측 두 번째 기둥 앞에는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남자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은 고적조사를 하면서 촬영된 사진으로서 고적조사 요원 중의 한 사람 모습으로 생각된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2고주 7량가로서 전면에는 툇간을 두었다. 전면 툇기둥에는 출목 없는 이익공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서 정면에는 4단의 잔다듬한 장대석을 쌓았으며, 그 위에 두께가 낮은 두겁돌을 얻고 동서의 계단을 통해 기단 위로 올라간다.
동서 계단과 주변 장대석이 뒤틀리는 등 파손이 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앙에 대성전(大成殿) 편액을 걸었으며, 좌우 1칸에는 살창을 설치하고 중앙 3칸에는 쌍여닫이 판장문을 설치하였다. 대성전을 중앙에 두고 좌측에는 서무가 높게 보이고 우측에는 동무가 서무에 비해 낮아 보이게 촬영되었다.
마당에는 은행나무 3그루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서무의 기단 석축은 무너지고, 빗물로 인해 마당에 골이 깊게 패인 것을 보면 오랫동안 경내 관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다.
배치 형식은 경사지에 주로 적용되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으로서 앞쪽에는 강학시설인 명륜당을 배치하였으며, 뒤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26년 판목 조치가 남루를 세운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9년에 중건하여 현재까지 중수를 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는 공자와 4성 등 133위를 배향하던 ‘대설위(大設位)’ 향교였으나 1966년에는 25위, 2006년부터는 39위를 배향하고, 봄과 가을 초정일(初丁日)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이 되었던 유교의 상징적 존재였던 향교는 근대화 물결에 따라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사상가에 의해 위패가 소각되기도 하였다. 또한 신식 교육이 시작되면서 1949년 상주고등공민학교, 1961년에는 남산중학교로 이용되면서 전통 향교 기능이 퇴색화되었다.
2000년 이후가 되어서 ‘경북북부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명륜당, 남루, 동서무 등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고, 강학시설인 충서당을 건립하여 명륜 교실 운영 등 유교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운영하면서 향교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