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경찰의 전신(前身), 상주분견소 【 2 】
본문
「상주수비대 전경(尙州守備隊ノ景)」이라 기록된 우편엽서의 사진이다. 기와집 출입구 오른쪽에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위쪽 글씨는 판독이 되지 않으나 아래쪽에는「상주분견소(尙州分遣所)」라 쓰여 있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 이후 사회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때 지방의 치안은 경무청을 설치하여 담당하여 왔다. 1905년부터는 일본인 경시, 경부, 고문 등이 맡았고, 1907년에 와서는 사실상 한국경찰의 전권을 일본인이 장악한 후 수비대-헌병대-경찰 형태로 지방 치안 유지를 담당하였다.
상주 수비대는 1907년 여름 한국군대가 해산된 후 강원도, 경상도 북부, 충청도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1907년 12월부터 대전의 보병 제47연대 산하의 각 대대가「상주수비대」로 배치된다.
1908년 8월에는 지방관제의 개정으로 관찰사 밑에 경찰부를 두고, 일본인 경시(警視)를 경찰부장에 임명하였으나 치안업무는 헌병과 경찰이 같이 맡고 있어 일원화되지는 못하였다. 이 당시에 상주에서는「헌병분견소」가 설치되어 경찰사무 일체를 집행하였다.
1919년 8월에는 헌병제도를 폐지한 후 경찰제도가 확립되고, 경찰서를 설치하여 헌병분견소의 사무를 인수함과 동시에 종전의 헌병분견소 출장소를 모두 경찰관주재소(支署)라 개칭한다.
사진 배경의 건물은 상주목 관아의 내아(州衙)로 추정되는 건물로서 팔작지붕의 안채에 양익사가 붙은 형식이다. 내아 건물로 추정하는 것은 1901년에 이한응 군수가 재임해 와서 동헌(聽猶堂)이 실화로 소실되었고, 그 후에 군수는 제금당에 거처하였으며, 수년 후에 는 수비대가 되었다는 기록이 지역의 향지인「상산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 사진이 촬영된 시기는「헌병분견소」가 설치된 1908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상주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