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 현장, 상주재판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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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재판기관은 조직, 인사, 예산, 업무, 지휘감독 등 사법행정의 전반에 걸쳐 조선총독의 지휘 감독을 받았고, 검찰기관도 재판소의 부설로 되어 있어 독립된 사법기관이라기보다는 총독의 행정집행을 법적으로 보강시키는 보조기관이었다.
이 사진은 ‘상주군재판소’ 의 전경이다. 정식 명칭은 ‘대구지방재판소 상주군재판소’로서 1909년 1월 20일 설치되었는데 이때의 위치는 서성동 147번지 일대이다.
현재 위치로 보면 왕산 서쪽으로서 제일교회 서쪽이 된다. 이 건물은 상산지에 ‘옛 호장청(戶長廳)에 검사실, 공판정, 창고 등을 증축하여 쓰고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상주목의 호장청 건물이 재판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호장청은 호장의 집무실로서 호장은 고려·조선 시대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이다. 호구장적(戶口帳籍)의 관장과 전조(田租)·공부(貢賦)의 징수 상납, 역역(力役)을 동원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외에 무적 기반(武的基盤)의 호족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장으로 임명된 후 지방 군사조직의 장교가 되어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가계(戶長家系)는 대체로 그 직이 세습되었고, 조선시대 양반계층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계층이 되기도 했다. 즉 고을의 수령인 목사는 중앙에서 발령하여 파견되는 관직이나 호장은 지방에서 대대로 권세를 유지하고 있던 지방의 최고 실세라고 할 수 있는 계층이다. 이러한 지방의 세력층 건물이 재판소로 사용된 것은 이 시기에 조선시대의 전통 세력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건물을 보면 초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초익공 건물로서 팔작지붕이다. 1909년 11월에는 공판정과 화장실 등을 증축을 하여 재판소로 사용하였다. 증축공사 때의 설계도를 참고하여 재판소로 사용하기 전 옛 호장청 건물의 규모를 추측해보면 정면 41.5자(尺), 측면 16.5자(尺)로서 62.85㎡ 정도였다.
사진에는 높은 기단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고, 기단과 마루 바닥사이에 다시 1단을 두어 내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마루 밑에는 하방벽을 1단 석축으로 쌓아 마루 하부를 막고, 주출입구에는 쌍여닫이, 벽에는 미서기창을 설치하여 좌식 생활의 전통한식 건물을 입식 생활에 맞추어 놓았다.
이 건물은 1929년 옛 상주읍사무소 앞 남성동 13번지 일대에 법원 청사를 신축하였는데 그때까지 재판소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사진에는 호장청 건물 우측에 증축된 공판정 형태의 건물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09년 11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 상주박물관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