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세무서의 전신, 상주재무서(95)
본문
일제강점기 재무서는 조선의 재정 장악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아 고종을 퇴위시킨 후 일본인이 한국 정부의 주요 관직을 차지해 자신 의도대로 개편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1908년 1월부터 지방행정 기구와는 별도로 ‘재무서’를 신설해 ‘재무감독국’의 감독 아래 해당 지역의 세무와 재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 결과 서울·대구 등 5개소에 ‘재무감독국’이 설치되고, 그 밑에 231개소의 ‘재무서’가 신설되었다. 재무서의 관할구역은 이후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재무감독국장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재무서장도 대부분 일본인으로 임명되었는데 상주는 대구 재무감독국 소속 상주재무서로서 서장은 조선인이 임명되었다. 이때 서장은 재무관으로 1908년부터 1909년 백낙진, 1910년에는 유상범이었다.
이후 1910년 8월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조선의 정부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재무감독국’과 ‘재무서’도 폐지되고, 그 업무는 지방 각 부·군 등 지방행정 기구로 넘어가게 되었다.
상주재무서에 관해서는 1928년에 발간된 상산지의 기사에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군청을 소개하면서 ‘이한응 군수가 1901년에 재임해 와서 동헌이 실화로 소실되어 제금당에 거처하였으며, 수년 후에 수비대가 되었다. 또한 세무소가 옮겨왔고, 1909년에 이방청을 새로 지었다’라고 했다. 이 기사로 유추해 볼 때 제금당과 내아가 수비대와 세무소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에는 양익사 형태의 목조, 와가로서 중앙 우측 기둥에 상주재무서(尙州財務署)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앞에서 양복 2명, 한복 차림의 33명과 함께 기념사진 형식으로 촬영했다. 이 사진은 상주 재무서가 설치된 후 사무소를 개소하면서 대구 재무감독국과 상주재무서 직원이 함께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무소 건물은 익사 사이의 공간이 10명 정도가 앉을 만큼 좁은 것으로 보아 제금당 서쪽에 있었던 옛 상주목 내아 건물로 보인다.
1934년 4월에는 대구와 경성, 광주, 평양, 함흥에 세무감독국을 두고, 전국 99곳에 세무서를 설치했다. 대구 세무감독국 관할은 대구와 경상도 전역으로서 경북에 9개, 경남에 10개의 세무서가 설치됐는데 이때 상주에도 세무서가 설치되었다가 1943년 12월 폐지되고, 지금의 세무서는 1949년 8월에 설치됐다. <사진 : 상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