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37) - 커피 자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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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37)
-커피 자판기
우리 사랑은 저녁보다 빨리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뜨거운 속 아프게 헹구며
바람과 안개 조금 섞어 뚝딱
뜨끈한 국밥 닮은 종이컵 커피 한 잔 말아주는
당신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길동무 되어주는 일
당신은 내 가는 길 미리 알고 오래된 앞치마에 손 닦으며
내 어깨 두드리는 착한 길동무, 때로는
천하대장군으로 우두커니 내 푸른 골목을 지키었지
그냥 그 기 오래도록 글썽이는 눈물
그냥 그 기 지면서도 아름다운 저녁을 배우며
어깨 굽은 내 어둠도 묵묵히 안아주었지
바람 부는 날은 내 안으로 걸어온 당신이
파랗고 빨간 생각을 흔드는 신호등이 되고
먼 별빛을 내며 오래된 상형문자 읽어주었어
늙은 암탉 따듯한 알을 내리듯
종이컵 툭 내려놓는 아침
아무 말 없어도 서로가 고마운 당신과 나
[시작 메모] 제가 멀리 여행을 떠나는 날이면 아내는 동전 몇 백 원 건네주며 자판기 커피나 한 잔 마시라고 합니다.
저는 고급 음식이나 차를 마시면 두드러기가 납니다. 자판기나 일회용 커피는 아무리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습니다. 체질입니다. 자판기 커피 마실 수 있는 동전 몇 개 있으면 여행 준비는 끝입니다. 주머니에 동전 몇 개 딸랑거리니 또 여행을 떠나야겠습니다. 어느 날 커피 자판기가 뜨거운 제 가슴에서 커피를 헹구어 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종이컵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순서를 기다리고 여러 개의 버튼이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기다림입니다. 철이 든 자판기가 어느 날 커피를 눌렀는데 커피는 나오지 않고 물만 한 컵 쑥 내밀며 먹어보라 할지 모릅니다,. 그런 날도 피식 웃을 수 있는 법 일러줄지 모릅니다.